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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걸] 이국의 맛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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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포탈라 레스토랑 작성일13-01-04 19:35 조회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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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대륙도 아니면서 점점 자비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돼가는 매서운 한국의 겨울. 서울 한복판에서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외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대설 특보를 배신하지 않았던 눈, 주변에서 들려오는 빙판길 사고 소식, 출퇴근길마다 전기 고문이라도 하는 양 인정사정 없는 추위. 두꺼운 퍼 재킷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올해 처음 해봤다. 그나마 갖고 있는 얇은 퍼 재킷과 닥터마틴 컴뱃 부츠로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선택한 건 솜을 두툼하게 넣은 빨간색 아디다스 점퍼와 스니커즈다. ‘시보리’가 있는 빵빵한 점퍼를 입고, 달려 있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회색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장갑을 낀 모습에서 난 스스로 <사우스파크>의 (매일 한 번씩 죽는) 케니를 발견했다. 동남아, 남미, 어디라도 좋으니 덜 추운 곳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작년 여름 따사로운 햇볕 쬐던 베트남이, 재작년 여름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온 태국이 자꾸 생각났다. 호치민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먹던 쌀국수도 그립고, 방콕 골목의 작은 식당 테라스에서도, 호텔의 스카이 라운지에서도 피안의 맛이었던 팟 타이가 절실해졌다.

결국 초가을에 처음 갔던 연남동의 ‘툭툭 누들 타이’를 다시 찾았다. 태국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는 이곳의 음식을 한술 입에 떠넣어야만 마음의 온도나마 올라갈 것 같아서였다. 태국 음식이 너무 좋아 아예 음식점을 열었다는 주인장이 태국에서 직접 실어 나른 소품들과 연보랏빛 벽, 셰프들의 반가운 인사에 마음이 이미 1도쯤 따뜻해진 기분이다. 방콕의 그 식당에서 실내에 앉았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날만큼은 더더욱 전에 먹어보지 않았던 음식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직원의 추천에 힘입은 최종 선택은 얌운센 스지 샐러드와 뽀삐아 쁘라짠. 샐러드에는 채소와 당면, (나중에 알고 보니) 소 힘줄이 들어 있었고 시큼한 맛이 났다. 피시 소스와 라임 주스를 쓴 듯했다. 발음도 힘든 뽀삐아 쁘라짠은 쌀 전병에 다진 새우살과 돼지고기를 넣고 튀겨낸 요리. 둘 다 간은 입맛에 맞았다. 가게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사방에 붙어 있는 툭툭 그림에 지난 여름 툭툭 기사에게 사기 아닌 사기를 당했던 기억도 잠시 떠올렸지만, 부푼 배를 두드리며 그쯤은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그러고 보니 바이옥 스카이 호텔에서 근무했다던 세 명의 셰프, 오파스와 자런, 나타웃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어차피 조만간 또 갈 것이 분명하니, 조금 미루기로 한다.

청계천을 지나던 날에는 꼭 가보고 싶었던 ‘포탈라’에 갔다. 국내 유일의 티베트 레스토랑이고, ‘맛집’ 리스트에 올라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명동 재개발 구역에 있었던 이곳은 자리를 잡을 만할 때쯤 강제 철거 통보를 받았고 지난한 싸움 끝에 몇 달 전 청계천에 다시 가게를 오픈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곳이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어떻게 변해 있을지, 티베트의 정취와 음식의 맛은 어떨지 궁금하던 터였다. 문을 열자 이국적인 티베트 음악이 흘러나왔고, 화려한 색상의 패브릭과 조명이 눈에 띄었다. 티베트 난민을 돕는 단체 록빠의 ‘사직동 그가게’에서 본 듯한 물건들도 곳곳에 놓여 있었다. 엄지손가락 그림과 함께 ‘강추’ 표시가 붙은 툭빠를 시켜봤다. 고기와 채소로 국물을 우려낸 따뜻한 면은 고기 국물 특유의 기름기가 적당해 담백하고 시원했다. 샤박레는 양념한 고기와 채소를 넣고 튀겨낸 빵. 튀겼지만 느끼하지 않고 식감과 맛이 좋았다. 처음 먹는 음식 치고 너무 잘 먹어 내 식성을 새삼 돌아볼 지경이었다. 유목민의 음식은 화려한 장식도, 수준급의 기교도 없었지만, 맛도 모양도 꾸밀 줄 모르는 그 소박함이 더 좋았다. 이주 노동자로서 티베트 인권 운동을 해온 텐진 민수 대표는 티베트가 중국의 간섭을 받고 현대화되면서 음식을 비롯한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티베트와 한국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며 능숙한 우리말로 이야기하는 그에게서 15년이 지나 이제는 떠날 수 없게 돼버린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녹사평역 근처에는 몇 달 전만 해도 보지 못했던 레스토랑이 생겨 있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며 씩씩하게 들어갔다. 벽돌과 적색 흙빛으로 마감된 벽에는 아랍권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시리아, 어머니는 그리스 출신으로 자신은 두바이에서 태어났다는 이드를 만난 곳도 바로 이곳, ‘레알리 두바이’에서다. 중국과 싱가포르, 일본 등에서 사업을 하다 한국이 좋아 무역 회사를 새로 차리고 눌러앉았다는 그가 셰프 출신인 아버지의 조언을 구해가며 레스토랑을 오픈한 건 돈 때문이 아니라 했다. 한국에 제대로 된 아랍 음식을 알려주고 싶어서라고 말이다. 시리아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두 명의 셰프를 직접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연신 “한국 좋아”를 반복하는 그의 앞에서 막상 메뉴판을 펼치니 뭘 먹어야 할지 잘 몰랐다. 정통 아랍 음식들이라는데, 케밥만 찾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막글루베와 라흠 아진이라는 걸 시켜 친구와 먹기 시작했다. 막글루베는 한 사람을 위한 세트로 서브되는데, 빵과 밥, 치킨 수프가 함께 나온다. 인도 쌀로 지은 고슬한 밥에 잘 익힌 가지를 곁들이니 심심한 듯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웠다. 치킨 수프는 묽은 커리 같았다. 감자도 닭다리도 푹 삶아 몇 번 씹지 않아도 꿀떡 넘어갔다. 라흠 아진은 다진 고기를 직접 반죽한 빵 위에 평평하게 올려놓고 구운 일종의 아랍식 피자랄까? 시리아에서는 굉장히 대중적인 음식이라는데, 일일이 반죽해 구워낸다는 빵과 비계를 발라내 담백한 고기, 향신료가 잘 어우러진 독특한 맛이다. 이곳에서는 다행히도 셰프 무함마드에게 “맛있어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조심스레 고백컨데 상수역 근처의 ‘자마이카왕’은 나

름 내 단골 술집 중의 하나다(지금도 그곳에는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술이 있다). 홍대 앞 ‘쿠바왕’의 2호점으로, 쿠바왕, ‘루츠타임’과 더불어 홍대 레게 바 삼총사로 불리는 곳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얼굴을 들이밀었으면서 갑자기 촬영차 가겠다고 새삼스레 아는 체하기가 민망했다. 전화로 시치미 뚝 떼고 취재를 요청했다. 물론 들어가자마자 “몇 번 오셨죠?”라는 말을 듣고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지만. 루츠레게, 러버스락, 덥 등 레게 음악이 시종일관 흘러나오고 온통 빨강과 노랑, 녹색이 현란한 이곳은 어쩌면 분위기로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이국적인 장소 중 하나일 거다. 리모콘에도,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라이터에도 세 가지 색 테이프를 (수작업으로) 감아놓는다는 건 이날 알게 된 사실이다. 독특한 술 메뉴 중에서도 자마이카 소주는 럼과 소주를 베이스로 파인애플과 레몬 등을 넣고 직접 담근 술.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건 이름처럼 크리미한 크림 맥주로, 얼마 전에는 커피 향이 나는 크림 흑맥주도 나왔다. 이외에도 고추가 들어가 매콤한 칠리 비어, 창시자가 맨 처음 옷을 홀딱 벗고 만들어서 세 병 정도 마시면 이성이 그리워진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 차마 마셔보진 못한) 에로틱 비어 등 맥주 리스트도 보통이 아니다. 막상 가장 잘 나간다는 치킨은 아직 먹어보지 못했지만, 모토와 푸틴, 낯선 안주들을 시켜서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이쯤 되면 미국에서 레게 바를 운영하는 한국 분이 CD를 잔뜩 싸 들고 찾아온 적도 있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1월에는 친분이 있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 와다다 라디오 식구들과 이벤트를 기획 중이라 했다. 실타래에서 실 풀듯 감칠맛 나게 이야기하는 주인장의 말을 들으며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다. 또 한 번의 마감이 끝나면 내 몸 뉘일 곳이 한 군데 더 생기겠구나.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강경민(KANG, KYUNG MIN)

포토그래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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